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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기계식 시계 기술

중력과 기계식 시계 기술


손목위의 회오리 바람, 루르비용(Tourbillon)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극복하기 위한 기계식 시계 기술의 정수


기계식 시계의 재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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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기계식 시계에 새로운 요소들은 많지만 기능 그 자체로만 보자면 특별하진 않다. 이미 선대가 개발한 기능에 첨단 소재와 정교한 기술을 더하여 과거에는 한계로 여긴 부분을 넘어 더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1500년 이후 발전한 기계식 시계 역사는 한 순간 쿼츠 무브먼트의 양산에 타격을 받고 1980년 이후 쇠퇴일로를 걸었지만, 1990년 이후 부활했으니 이제 30여 년이 지난 셈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기간인데도 사람들은 쉽게 잊어 버렸다. 그건 현재의 시계가 더 이상 특별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꼭 시계가 아니더라도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흔해진 가운데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색다른 매력이 있어야만 했다. 특히 고가의 시계를 구입할만한 가치나 명분을 위해서 시계 브랜드들은 저마다 기술, 소재, 형태라는 기본 요소 외에 역사라는 아우라로 감쌌다. 과거에 선보인 제품을 새롭게 재현하고 개선하며 점점 더 기능적으로 복잡한 시계들을 내놓는 것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이다.

브레게의 투르비용(Breguet Tourbillon).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투르비용을 처음으로 고안했다. 레귤레이터 부분을 고정해서 60초에 한 바퀴씩 돌려주는 장치를 이용해 중력으로 인한 오차를 줄여준다.


손목 위의 회오리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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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비용의 원조 브레게(Breguet)에서 만든 Classique Complication 5347. 투르비용은 시계장인 한 명이 1년에 걸쳐 만들 정도로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첫번째 공략 대상은 투르비용(tourbillion)이다. 18세기의 천재적인 시계 제작자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eut, 1747~1823)가 1801년 고안한 투르비용은 프랑스어로 ‘회오리 바람’이란 뜻인데, 아마도 부품이 돌아가는 형태를 보고 착안한 듯 하다. 무브먼트 부분에서 설명했지만 배럴, 기어 트레인과 연결된 밸런스 스프링과 밸런스 휠, 팔레트, 이스케이프먼트 휠로 구성된 레귤레이터 부분을 새장과 같은 케이지(cage) 또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캐리지(carriage) 안에 고정해서 이를 돌려주는 것이다. 보통 60초에 1바퀴씩 도는데 왜 이런 복잡한 장치가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중력 때문이다. 지구는 자성과 중력을 가지고 있어서 지구 중심부로 모든 물체들을 끌어 당긴다. 끊임없이 진동하는 밸런스 휠 부분도 하중을 받기 마련인데, 그 하중을 한 바퀴 돌려줌으로써 중력을 상쇄시켜 결국 중력에 의한 오차를 줄일 수 있다. 투르비용을 개선, 변화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브랜드마다 각기 고유한 이름을 붙인 투르비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투르비용은 보통 캐리지를 지지하는 브릿지를 양쪽에 두는데 반해 한쪽에만 연결해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플라잉 투르비용(flying tourbillion)도 있다. 기술적으로 어렵지만 미적으로 아름다운 투르비용이다. 다이얼 위에서 투르비용이 시침 역할을 하면서 돌아가는 형태의 시계들도 있다.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는 마스터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모델에서, 율리스 나르덴(Ulysse Nardin)은 프릭, 피아제(Piaget)는 투르비용 릴라티프란 이름으로 소개했는데 모두 플라잉 투르비용을 응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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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WC의 Portuguese Tourbillon Hand-wound. 플라잉 투르비용과 유사한 투르비용으로 브릿지 부분을 투명한 사파이어 글라스 판으로 연결하여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아름답다.


블랑팡(Blancpain)이 소개한 카루셀 투르비용(caroussel tourbillion), 카루셀 이스케이프먼트(Karrusel Escapement)라고도 부르는 시스템은 1893~1894년 덴마크의 시계 제작자 반 보니스켄(Bahne Bonniksen)이 발명한 것으로, 투르비용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투르비용이 4번 기어의 축을 따라 밸런스 휠과 이스케이프먼트 휠이 평행선상에서 움직이는데 반해 카루셀은 4번 기어 위에 세컨드 휠을 두고 이스케이프먼트 휠과 밸런스 휠이 겹쳐진 상태로 움직인다. IWC가 포르투기즈 라인에서 소개한 미스터리 투르비용(mystery tourbillion)은 양쪽 또는 한쪽에서 잡아주는 브릿지가 보이지 않고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지축을 투명한 사파이어 글라스로 대체해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여러 가지 투르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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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벨 포지(Greubel Forsey)의 더블 투르비용 시계.

평평한 상태에서 도는 것이 아니라 살짝 기울어진 상태로 도는 토마스 프레셔(Thomas Prescher)의 더블 액시스(double axis)나 제라 페리고(Girard-Perregaux)의 바이액시얼(bi-axial), 그뤼벨 포지(Greubel Forsey)의 더블 투르비용(double tourbillion)은 축을 2개를 두고 한 축이 24초 또는 30초에 1회전, 바깥 축이 자체로 60초에 또 한번 회전하는 방식이다. 더 발전한 것은 3차원 투르비용으로 2004년 토마스 프레셔가 선보인 트리플 액시스(triple axis), 예거 르쿨트르가 선보인 자이로투르비용(Gyrotourbillon) 등dms 둥근 구 형태의 투르비용으로 안쪽은 30초에 1회전, 바깥쪽은 60초에 1회전 한다. 브레게, 그뤼벨 포지 등에서는 투르비용이 한 개가 아니라 2개를 장착한 시계들을 만들기도 했다.


워낙 섬세한 부분을 전체 회전시키는 기술은 지금까지도 고난이도에 속한다. 다만 기계식 시계의 부활 이후 각 브랜드에서 자사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1~2개씩 내던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지금은 더 많은 브랜드에서 생산 능력을 갖추고 독자적인 투르비용을 소개한다. 투르비용 창시자의 뒤를 이은 브레게는 그 명성에 부합하는 투르비용 탑재 시계를 다수 개발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덕분에 이제 투르비용은 더 이상 일 순위로 내세울 정도의 대표 선수는 아니지만 여전히 투르비용은 저만큼 높이 있다. 만들기 힘든 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까. 손목 위에 회오리 바람을 얹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