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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역사 Car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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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역사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Adolphe Picard)의 견습생이었던 루이-프랑스와 까르띠에(Louis-FrancoisCartier,1819-1904)가 몽토르고이(Montorgueil)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며 시작된다. 

Cartier 까르띠에.jpg 1856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지배하던 시기가 끝나고 이후 파리는 활기를 되찾았다. 파리와 무도회는 끊이지 않았으며, 두 번째의 프랑스 왕정은 각 분야에 있어 사업 확장 장려하였다.
1853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첫 번째 사촌이었던 마티드 공주(Princess Mathilde)의 후원으로 사업을 확장하였으며 파리 상류층 심장부였던 이탈리아 대로(Boulevard des Italiens) 9번가로 또 한번 사업장을 옮긴다.

루이-프랑스와 까르띠에는 유지니 황후(Empress Eugenis)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재봉사인 윌스(Worth)와 친구가 된다. 
이것은 훗날 그들 가족의 결혼으로까지 이어져 오랜 우정을 지속하는 계기가 된다.
이 프랑스와 까르띠에는 가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었던 루이 프랑스와- 알프레드(Louis-Francois-Alfred, 1841-1925)에게 기술을 가르쳐 사업에 참여시키고 1874년, 알프레드는 회사 경영을 인수 받는다. 
그 후 1898년, 알프레드는 다시 그의 첫번째 아들인 루이와 동업을 시작한다. 

1899년 까르띠에사는,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부였던 뤼 드라 빼(rue de la Paix) 13번지로 옮겨 새로운 장을 열었고 그곳에서 까르띠에는 미래의 대망을 세우게 된다. 
그 이후로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를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알프레드 세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사업 감각과 천재적인 창조력을 지닌 루이(Louis: 1875-1942)는 뤼 드라 빼(rue de la Paix)에 있던 사업장을 관할한다.
1902년 루이는 자끄(Jacques, 1884-1942)와 피에르(Pierre, 1878-1965)로 하여금 각각 런던, 뉴욕에 지사를 세우도록 하였고 두 줄로 된 흑진주 목걸이와의 교환 조건으로 얻은 뉴욕 5번 가의 모트 플랜트 빌딩(Morton Plant Building)은 훗날 까르띠에 인터내셔널사의 본부가 된다. 
단지 두 세대 만에, 까르띠에 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보석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웨일즈(Wales)의 왕자에 의해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라 칭송 받은 까르띠에는 장차 왕의 대관식에 쓰일, 보석이 박힌 27개 왕관의 제작을 위임받는다. 1902 년에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7세도 1904년 영국 황실의 보석상이란 명예를 까르띠에게 부여한다. 이와 같은 명예는 그 후 스페인, 포르투칼, 루마니아, 이집트 왕실, 올리언즈 일가, 모나코 왕국, 그리고 알바니아 왕실에까지 이어졌다.

세 명의 아들들은 최상의 고객 확보를 위해, 고급 살롱 안에서의 고객 유치뿐만 이 아니라, 세계 전역을 여행하였다.
피에르는 그의 형 루이의 부탁으로, 피터 칼 파베제(Peter Carl Faberge)와 경쟁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최상의 에나멜과 단단한 석재의 동물상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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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년에는 뉴욕의 이블린 맥린 부인(Mrs. Elverlyn McLean)에게 "희망(Hope)"이라 이름 붙은 유명한 푸른 다이아몬드를 팔기도 했고 록펠러(Rockerfeller), 반더빌트(Vanderbilt), 굴 드(Gould), 포드(Ford) 가문 등 세계적인 재계와 근대산업계 고객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런던의 기반을 둔 자끄(Jacques)는 페르시아만 의 아름다운 진주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인디아로 건너간 자끄는 마하라자(Maharaja: 인도의 왕자)의 부탁을 받아 다양한 색체의 보석들과 까르띠에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재창조 작업을 하게된다. 
또한 자끄는 피에르와 역사적으로도 유명했던 유서포브(Yussupov) 왕자의 전설적인 진주의 다량 구매를 담당하기도 했다.

루이는 파리에서 러시아로 귀족 고객들을 확보하고,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St. Petersburg)에서 몇 번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루이는 플라티늄을 도입, 보석계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것은, 루이 13세 스타일을 새롭게 한 "화환(garland)" 스타일을 완벽의 경지에까지 올려 놓았다.
위대한 걸작품의 창조자이며 심미인과 사업 감각을 동시에 갖춘 루이는, 미스테리 클락(mystery clock)과 같이 종종 특허권을 받아내기도 한, 시계제작에 있어서는 독특한 기교와 기술적인 완성을 예술적인 감각과 접목시켜 고급 액세서리 제작에 적용시켰다. 

그는 보석 전문가로서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식견과 사업적 기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루이의 주위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많은 영감을 제공해 준 최고의 공예가인 디자이너 찰스 자끄(Charles Jacqueau)를 비롯하여 모리스 쿠에(Maurice Couet), 에드몬드 에거(Edmond Jaeger)등이 있었고, 지안 투상(Jeanne Toussaint)과 같이 헌신적인 협력자도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디자인이나, 희귀한 발견물,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것들을 그의 창조물에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성공을 거두었고 그 모든 것이 그들 고유의 스타일, 즉 까르띠에 스타일로 연결되어 진다.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찰스 자끄는 특별히 이집트, 페르시아, 러시아와 동양 문명에 관심이 높았으며 러시아의 발레에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한다. 

루이 까르띠에 가 지닌 본능적인 감각에 힘입어 자끄는 강한 색채감을 오닉스, 산호와 같은 새로운 재료에 적용, 보다 기하학적인 모양의 보석을디자인했고,1925 년 이후 계속 진행 중이던 "아트 데코(Art Deco)"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다.

뛰어난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쿠에(Maurice Couet)와 함께 자끄는 1850 년경 시작된 루베르-오당(Roubert-Houdin)의 원칙을 응용, 미스테리 클락(mystery clock)의 성능을 발견, 향상시켰다. 까르띠에 의 극적인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예로서 6개의 현관 모양 시계(six portico clock)와 12 개의 중국식 탁상시계를 들 수가 있다.

1888 년, 처음으로 선보여 1911 년까지 이어지는 손목시계의 성공적 판매 기록은 산토스 시계의 놀라운 성공에 기인한다. 최초의 산토스 시계는 1904 년 브라질의 비행사인 알베그토 산토스-듀몽(Alberto Santos-Dumont)을 위한 선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산토스 시계 이후 1907 년에 에드몬드 에거 와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 특허를 받은 손목시계 버클과,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용 차량에서 이름을 딴 '탱크' 디자인이 탄생하게 된다.

코코 샤넬의 친구이자 권위주의자였고, 놀랄만큼 숙련된 기술의 소유자인 지안 투상은 품질 평가에 대한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아 루이 까르띠에 와 함께 일하게 된다. 시작부터 그녀의 판단은 완벽했고 어떤 실수나, 판단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루이 까르띠에의 보석을 샤넬(Chanel), 디올(Dior), 발렌시아가(Balenciga), 쉬어파렐리(Schiaparelli)와 같은 오뜨 꾸뛰르(Haute Counture: 파리에서, 최신 유행의 숙녀복을 만들어 내는 고급 의상점)처럼 필수적인 부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923 년, 찰스 자끄는 새로운 스타일의 고급 악세사리의 디자인을 위해 "S"라 불리는 부서를 만들었고 (원래는 Les Must de Cartier의 아이템) 그것은 그들의 제품을 보석으로부터 보다 광범위하게 대중적인 것으로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된다.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가 지안 투상(Jeanne Toussaint)에게 최고 보석류에 관련된 일을 위임시키기 전부터 업무의 상당 부분이 계속 그녀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같은 해, 까르띠에는 "미스테리 세공"으로 널리 알려진 "보이지 않는 보석받침(invisible mounting)"을 발명, 특허를 얻는다.

1928 년부터 1930 년 사이 아르 테고 스타일로부터 벗어나 소위 '백색의 시기'라 불리는 표류기간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플라티늄과 수정, 그리고 갸름한 네모꼴로 세공된 다이아몬드인 "바게트(baguette)"가 복합적으로 유행하던 시기이다. 
이와 같은 근대적이고도 수수한 디자인은 1912년경의 루이 까르띠에 디자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 자연주의로의 희귀를 느끼던 지안 투상은 윈저 공작부인(Duchess of Windsor),
바바라 허튼(Babara Hutton), 그리고 니나 다이어(Nina Dyer)와 같은 최대의 고객을 위해 꽃, 식물과 같은 식물상, 그리고 팬더와 호랑이 같은 동물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루이 까르띠에의 경영 하에서, 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모든 형태의 보석 예술을 진보시켰으며 보석류, 시계, 악세서리를 예술 표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까르띠에의 예술'이라 칭송하였다. 동시에 그는 고가품 시장을 새로이 열기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

루이 까르띠에 와 그의 동생 자끄는 모두 19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루이 까르띠에와 자끄 형제의 죽음으로 인해 까르띠에의 사업권이 전 세계로 나뉘어 진 후, 4 세대 걸쳐 세계적으로 전대미문의 관심을 유지시켜 온 이 문화유산은 로버트 오끄(Robert Hocq)에 의해 주도될 운명에 처해 진다.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 온 이 훌륭한 회사의 성공은 오끄의 손에 그 미래가 달려 있었다.
가스 라이터의 가장 큰 제조업자였던 로버트 오끄(Robert Hocq)는 1968 년 까르띠에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센스를 얻어 고급 라이터를 만들어 냈다. 
이 타원형의 라이터는 당시 시장을 강타, 큰 성공을 거둔다.
1969년, 알랑 도미니크 페렝(Alain-Dominique Perrin)이 까르띠에의 라이터 회사인 Briquest Cartier S.A 사에 동참한다. 

조셉 카누이(Joseph Kanoui)에 의해 소집된 한 투자가들 그룹은 파리 까르띠에를 담당하기도 하고 로버트 오끄 회장을 선출했다. 이 전설적인 회사에 매료된 로버트 오끄는 그 전통에 빠져듬과 동시에 젊음의 향기와 현대 감각을 조직 내에 불어넣는다. 

로버트 오끄는 알랑 도미니크 페렝과 함께 "Must de Cartier"의 컨셉을 발전시켰고 그를 Must de Cartier 회사의 이사로 선출, 회사 개발을 위임시킨다. 첫 번째 "Must de Cartier" 부틱이 비아리츠(Biarriz)에서 오픈했고 이어서 싱가포르에서도 오픈했다.

투자가 그룹은 런던 까르띠에를 매입했고 도교에 "Must de Catier" 매장을 오픈했다. 로버트 오끄는 경매를 통해 역사적 의미가 담긴 물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다른 투자가 그룹은 조셉 카누이(Josep Kanoui)에 의해 소집되어 뉴욕 까르띠에를 매입, 경영권을 로버트 오끄에게 위임시킨다. 

1979년은 까르띠에 인터내셔널 격인 까르띠에 몽드(Cartier Monde)의 창립을 통해 전 세계에 분할되어 있던 까르띠에의 사업권을 통합하는 커다란 역사적 성취를 보여준 해였고, 비로소 파리, 런던, 뉴욕의 까르띠에가 하나로 통합, 관리된다.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로버트 오끄가 세상을 떠난 후, 조셉 카누이가 새로운 Cartier Monde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1980년, 나탈리 오끄(Nathalie Hocq)가 Cartier Paris S.A 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1981년, "까르띠에(Cartier)"는 "Must de Cartier"와 합병되었고 알랑 도미니크 페렝(Alain Dominique Perrin)이 Cartier paris S.A 와 Cartier International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1982년, 미쉘린 카누이(Micheline Kanoui)는 보석 디자인의 총 책임을 맡았고 그녀의 첫 번 째 컬렉션인"New Jewellery"를 선보인다.
1983년, 까르띠에는 두 가지 라이센스 합의 사항에 사인을 하고 "페레리 포뮬라(Ferrai Formula)"와 "입셍 로랑 콜렉션(Yves Saint Laurent collection)"을 등장시킨다. 

카누이와 페렝은 수년에 걸쳐 구입되어 온 까르띠에의 서명이 새겨진 골동품을 가지고 까르띠에 컬렉션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파리, 런던, 그리고 뉴욕에 소장된 자료를 이용, 제네바에 저장되어 있는 이 특별한 가치의 유산은 수십년 이상 개발해 온 까르띠에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새로운 상품들을 추가하면서 지속적인 확장을 해 나갔다.

1984년, 알랑 도미니크 페렝은, 까르띠에의 21세기 진입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결의를 증명하고자, 필요에 의해 까르띠에 현대 미술 재단(Cartier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을 설립한다. 까르띠에는 현존하는 예술가들과 연합하여 전 세계적으로 그 범위를 확장해 기업 이미지를 확고히 했으며 근대적 후원의 확실한 본보기가 된다.

같은 해, 한스 나델호퍼(Hans Nadelhoffer)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정확하고 잘 문서화된 참고물로, 그의 저서 "까르띠에(Cartier)"를 펴냈다. 이 회사의 전기는 까르띠에가 발전 시켜 온 예술적 자취와 까르띠에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1986년, 문화부는 알랑 도미니크 페렝을 기업 후원을 위한 공식대표로 임명한다. 

1988년 까르띠에는 피아제(Piagat)와 보메 메르시에(Baume & Mercier)의 대 주주가 되고, 엘드버그(Aldeberg) 매장의 체인을 인수한다.

1989년과 1990년에 걸쳐, 세계적인 명성의 파리 쁘띠 팔레 박물관(Patit Palasis Museum)의 요청으로 "까르띠에의 예술(The Art of Cartier)"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소개된다.
1991년과 1992년에는, 경고하고 세련된 시계 제조의 최초의 국제적인 전람회가 제네바에서 개최되었다. 
까르띠에의 유명한 펜더(Panthere)펜(pen)이 선보였고 5 번째의 새로운 보석 컬렉션이 "인도로 가는 길(Sur la Route des Indes)"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소개된다.

1993년 10월, 알프레드 던힐(Alfred Dunhill), 몽블랑(Montblanc), 피아제(Piaget), 보메 메르시아(Baume & Mercier), 칼 라커펠드(Karl Lagerfeld), 끌로아(Chloe), 술카(Sulka), 헥케트(Hackett), 시거(Seeger), 제임스 펄디 앤 선스(James Putdey & Sons)와 손잡고 "방돔 럭셔리 그룹(Vendome Luxury Group)"을 구성한다.

1994년, Cartier S.A 와 까르띠에 현대 미술 재단(Cartier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은 라스파이(Raspail)261 번 가에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장 누벨(Jean Nouvel)이 디자인한 건물에 새로운 본사를 개관한다. 까르띠에는 "Gold on Black" 의 가죽 제품을 선 보였고 제네바에서 개최된 제 4 회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SIHH)에서 까르띠에는 아르 데코(ArtDeco),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Saint Petersburg), 진주(Peals)를 주제로 하여, "산토스 듀몽(Santos-Dumont)시계 90 주년"을 기리며 플라티늄과 
핑크 골드로 한정 생산되는 세 가지의 새로운 정장용 시계를 선 보인다. 
새로운 보석 콜렉션인 "까르띠에의 메달 장식(Charm d'Or de Cartier)"과 "나투리(Natura)"도 함께 선보인다.
1995년, 제네바에서는 제 5 회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SIHH)에서 까르띠에는 "비 플랑(Bi-Plan)" 시계 콜렉션을 소개한다. 같은 해 도교의 테인 박물관(Teien Museum)에서 개최된 "라르 드 까르띠에(L'Art de Cartier Pen)"라는 전시회에서는 피샤(Pasha) 시계와 Pasha "C" 시계, 더불어 루이 까르띠에 펜(Louis Cartier Pen)이 첫 선을 보인다.

같은 해 로잔느 에르미타지 재단(Lausanne Hermitage Foundation)은 까르띠에 일가에 의해 만들어진 150년 간의 예술 창조를 보여 주는 "까르띠에, 보석의 화려함(Cartier Splendors of Jewellery)" 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1996년, "쏘 프리티 드 까르띠에(So Pretty de Cartier)"라는 대담한 느낌의 향수(fragrance)와 "머스트 드 까르띠에(Must de Cartier)"라는 고전적인 오 드 뚜왈렛(Eau de Toilette)이 소개된다. 제네바에서 열린, 제 6 회 국제 고급 시계 박람회(SIHH)는 탱크 프랑세즈(Tank Francaise) 시계 컬렉션의 첫 선을 보이는 기회였고, 남성용 까르띠에 가죽 컬렉션의 검정색 Pasha 역시 선을 보였다. 

1997년 까르띠에는 3 개 시리즈로 구성된 까르띠에 프리베(Cartier Prive)콜렉션을 출시함으로써 150 주년을 기념한다. 각각의 시리즈는 한정 생산되는데 그 중 3 개의 의미는, 유명한 까르띠에의 삼색 금반지를 상징하고 150 개는 150 주년 기념 해를 의미하며 1847 개는 까르띠에가 탄생한 해인 1847년을 상징하는 것이다. 콜렉션은 보석, 시계, 가죽 제품, 펜, 향수 그리고 악세 서리 등을 포함하고 있고, 이 제품들은 전 세계의 모든 까르띠에 부틱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150 주년 기념 행사를 벌일 것이고 아주 독특한 전시회도 열리게 된다. 아르 데코(Art Deco)를 주제로 한 전시회인 "까르띠에 1900-1939"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에서 시작하여 런던의 브리티쉬 박물관(British Museum)으로 이어져 3 월말까지 전시된다. 
그리고, 까르띠에의 현대 미술 재단은 파리의 독특한 전시회에서 개인적인 소장품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창조(Creation)"를 주제로 한 새로운 보석 콜렉션이 선보이고 뒤이어 유럽과 미국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